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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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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은 1976년 8월 18일 오전 11시경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사천교(돌아오지 않는 다리) 근방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하던 유엔사 경비병들을 북한군 수십 명이 도끼 및 흉기로 구타, 살해한 사건입니다.

 

 

도끼만행사건과 미루나무
미루나무로 인해 발생한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출처 : KBS 역사저날 그날)



사건의 발단은 북한군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중단하라는 요구를 유엔사에 계속해서 해왔던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북한군은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이 군사적 감시를 방해한다고 주장했고,

유엔사는 북한군의 요구를 거절하고 가지치기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사건 당일,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하던 유엔사 경비병들은 오전 9시경부터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오전 11시경, 갑자기 북한군 병력 수십 명이 작업장을 향해 돌진해왔습니다.

 

북한군은 도끼와 흉기를 들고 유엔사 경비병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습니다.

이 공격으로 주한 미군 장교 2명인 제임스 D. 보니파스 소령과 로버트 J. 버거 대위가 살해되었고,

한국군 경비병 8명도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북한의 도끼만행
미루나무 가지치기 도중 북한의 도끼 만행

 


사건 직후, 

유엔군과 북한군은 대치 상태에 돌입했습니다.

유엔군은 북한군을 향해 경고 사격을 했고, 북한군도 유엔군을 향해 포격을 가했습니다.

 

한반도는 전쟁 직전의 긴장감에 휩싸였습니다.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사건 발생 3일 후, 

미국과 한국은 북한에 대해 보복을 결의했고,

미국은 폴 버니언 작전을 발동하여 북한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강화했다. 

 

한국은 북한과의 모든 대화를 중단하고,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를 강화했습니다.

 


결국, 

북한은 유엔군의 요구를 수용하고, 사건의 책임자들을 처벌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에 따라, 유엔군과 북한군은 1976년 9월 15일 공동선언을 발표하고, 사건을 마무리하였습니다.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은 한반도 분단의 현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북한의 도발에 대한 국제사회의 단호한 대응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 당시 미국은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직후인 1976년 8월 21일, 폴 버니언 작전을 발동하였습니다.

폴 버니언 작전은 북한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강화하기 위한 작전으로, 미국은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 전투준비태세(DECON)를 3단계로 상향조정
- 주한 미군 병력을 증원
- 전략폭격기 B-52를 한반도에 배치 이동
- 미 해군 미드웨이 항공모함 함대를 한반도 인근 해역으로 전개

- 일본에 주둔중인 미군 F4 전투기 20여대 이동

 

데프콘 단계 (출처 : 국방부)

 

 

또한,

남한도 특수부대 64인을 결성하여 독수리 작전을 계획하고 진행하였습니다.

 

미루나무를 미군이 제거하는 동안 특수부대 64명이 목숨을 걸고 북한초소를 부수고 도발을 강행하였습니다.

북한군을 자극해 반응하면 공격할 계획이였습니다.

 

하지만, 북한군은 이미 지령이 떨어졌는지 겁을 먹어서인지 아무 반응하지 않았고,

미루나무만 제거하고 작전은 총격전없이 종료되었습니다.

 

도끼만행사건의 미루나무 제거 작업중

 


그 후, 미국의 이러한 조치로 인해 한반도는 전쟁 직전의 긴장감에 휩싸였고,

미국은 북한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통해 사건의 책임자 처벌과 피해 보상을 요구하였습니다.

실제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쟁에서 패배한 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국내적으로도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따라서 북한의 도발을 단호하게 응징함으로써 자존심을 회복하고, 국내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의 강력한 군사력을 고려하여 전면전을 벌일 가능성은 낮게 보았습니다.

따라서 미국은 북한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도끼만행 이후 전쟁위기
도끼만행사건 이후 전쟁위기


결국, 북한은 유엔군의 요구를 수용하고, 사건의 책임자들을 처벌하겠다고 약속하였고,

이에 따라, 한반도는 전쟁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폴 버니언 작전은 미국의 군사적 위력을 과시하고, 북한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에는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전면전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었던 만큼,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는 사건이었음은 틀림 없었습니다.

 

818 도끼만행 사건

 

 

당시 중국과 미국 사이는 1972년 닉슨의 중국 방문 이후 정상화된 상태였고,

두 나라는 경제 협력을 강화하고, 전략적 협력을 모색하는 등 관계를 개선해 나가고 있어서 중국의 북한 지원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미국 장교 2명이 사망한 상태니 말입니다.

 

 

만약이지만,

그때 북한과 전쟁이 발발하였다면 한국과 미국은 승리하여 통일한국을 이뤘을것으로 예측해봅니다.

그러나, 전쟁 이후 피해도 엄청날것이며, 복합적으로 계산해보면 득실을 쉽사리 예측하긴 어렵겠습니다.

 

 

그래도 언젠간 풀어야하는 한반도의 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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